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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콩트 9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기사승인 2020.07.20  11: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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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저씨가 출장 나가는 날이면 춘삼이가 아줌마 방에 숨어들어 흘레를...

〈당파싸움은 무조건적인 병폐였나〉

인류의 시작과 함께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정치가 생기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원래 투쟁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정적인 느낌이어서 거부감이 있지만, 이것을 견제와 균형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정치공학상의 필수불가결한 과정으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파벌싸움은 어느 나라 정치 집단이나 마찬가지로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에는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서로 간 숙청을 반복했다.

세계의 전근대 국가 통치나 권력투쟁 역사를 보면 조선 시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훨씬 더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도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사관에 의거 붕당정치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여 "조선 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

또한, 독재 권력 시기를 거치며 당파싸움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깎아내리는 것이 통치 차원의 프로파간다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 한국인에게도 스며들어 "한국인은 단결을 못 한다", "한국인은 누구 잘 되는 걸 보지 못한다" "때려야 말을 듣는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자조적으로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당파싸움은 그야말로 피로써 피를 씻는 숙청의 역사였기에 이를 바라보는 대부분 한국인의 인식은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로까지 여기며 상당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견제와 균형이 사라지고 일당 형태의 독재가 시작되었을 때 역사는 어떠한 비극을 맞이했는지 심각히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그렇다 보니 붕당정치의 순기능도 있었지만, 이를 논하는 사람들은 극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은 글제처럼 '당파싸움이 무조건 조선의 병폐였나'라는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간략히 풀어볼까 한다.

이미 당파싸움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새로울 것도 없지만, 짧은 글이나마 국가에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장치가 사라지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에 대한 고찰 정도로 보아주면 보람이다.

〈붕당정치의 시작과 쇠퇴>

붕당정치는 선조 때 훈구파를 구축한 사림이 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것을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 사계의 정설이다.

 

이후 정조 때까지 이어진 붕당정치는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의 사색으로 분화하며 각 당의 이해득실에 따라 피비린내 나는 사화, 옥사, 환국을 일으키며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학파, 문벌, 지역의식 등이 근간이 되어 생성된 붕당은 국익과 민생보다는 각 당파의 이익이 우선시 되었기에 사회가 분열되고 국력 결집에 결정적 장애가 되었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책을 쓰며 붕당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붕어 이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200년 이상을 이어온 붕당정치가 종말을 고하고 외척을 중심으로 하는 세도정치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세도정치는 조선사 후기를 민란의 시대 암흑기로 들어서게 하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중앙 권력이 안동 김씨를 비롯한 일부 가문에 집중되며 보수화가 진행된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매관매직을 통해 벼슬을 얻게 된 지방 수령들은 투자한 것 이상을 뽑아야 했다.

또한, 후일 더 높은 벼슬을 위한 청탁 보험금 마련 차원에서라도 백성들에게 가혹한 가렴주구를 일삼기 시작했다.

붕당정치 과정이었다면 상대 세력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져 이런 비리가 어느 정도 제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붕당이 완전히 말살된 상황에서 왕마저 자신의 처지를 염려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으니 권력을 잡은 외척 세력들의 비리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라의 근간이 되는 조세 정책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두고 삼정의 문란이라고 한다.

삼정은 전정과 군정, 환정(환곡)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동시에 백성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다. 탐관오리들은 못 쓰는 땅이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땅에 세금을 매겼고, 이미 죽은 사람의 몫까지 군포를 거두고, 군포를 내지 않고 도망할 경우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내게 했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빌려주면서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받았고 환곡을 운영하는 관리들은 쌀을 빼돌린 뒤에 거짓 장부를 꾸미기도 했다. 이에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1811년 발생한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민란 시대를 이끄는 전주곡이었다.

세도정치의 부패가 극에 달했던 임술년(1862) 진주에서 시작된 민란은 전국을 휩쓴 농민봉기로 발전하며 바야흐로 조선을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민란의 시대〉

외세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대표적인 조선 시대 난(亂)이다.

그 외 조선사에 등장하는 난(亂)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집권 세력의 전복을 위해 저항한 변란과 사회 구조적인 문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일어났던 민란 즉 농민봉기로 구분된다.

조선 개국 이후 1차와 2차 왕자의 난을 필두로 전기와 중기까지 발생했던 대부분의 난은 정치성을 띠는 변란 즉 반란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집중된 수십 차례의 민란은 세도정치와 맞물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생존 차원의 봉기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난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붕당 시기엔 그나마 백성을 하늘로 본다는 통치 철학이 존재했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지배층의 청렴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며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구조였다.

조선 시대는 왕이 매일 신하들과 독서토론을 벌이는 경연에 매일 참여하는 등 수신하며 군자를 표방하는 학자의 나라였고 이런 모습은 타 국가에 비해서도 모범이 될만한 시스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붕당과 권력 다툼의 목적은 '권력 획득' 자체에 있지 '권력을 휘둘러 이득을 본다'라는 개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부 역사학도들은 붕당을 연구하며 그 폐단에 치를 떨다가도 세도정치를 자세히 들여다볼 때쯤 되면 그나마 붕당 시절이 세도정치 때 보다는 훨씬 더 나은 시기였다고 평가하게 된다고 한다.

조선의 정치 체제가 무너지는 건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이지 오히려 붕당 시대에는 왜란과 호란 이후 국가 재건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붕당정치를 마치 근대와 현대의 민주적 정당정치에 비교하며 미화하려는 의도로 글이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붕당이 말살된 이후 이어진 세도정치가 너무나도 막장이었고, 그 폐단이 근대 조선의 발전을 막아 종국엔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데 일조한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당파싸움 시기에는 가해자 피해자 모두 이해 당사자인 소수의 권력층이었다. 하지만 세도정치 시기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당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무고한 일반 백성들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 투쟁과정에서 상대 당에 대한 비방과 상호견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견제와 균형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정의 모습까지 보이던 붕당정치가 망국적 세도정치 시기보다는 훨씬 양호하고 건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성인 콩트 9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아이는 집 뒤란에 신우대를 얼기설기 엮어 움막을 만들어 놓고 활이며 장난감 화약총 따위를 숨겨놓고 놀았다.

고구마나 누룽지 같은 주전부리도 비상식량이라며 가져다 놓았는데 아이는 그 움막을 본부라 했다. 동네 입구 이층집에 살던 제일의원 원장님 딸 단비는 본부에 거의 매일 제집처럼 드나드는 아이의 유일한 친구였다. 짚단에 대나무 활쏘기 놀이가 지칠 때쯤 되면 아이는 시위를 겨누던 두 눈을 더욱 과장된 표정으로 사팔눈을 만들었고 단비는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며 깔깔거렸다.

한동네에서 나고 자랐고 부모들끼리도 흉허물없이 지냈던 터라 둘이 붙어 다니며 노는 것은 크게 흉이 되지 않았다. 봄이 되면 새집 찾기 놀이부터 시작해서 한겨울의 연날리기와 썰매 타기까지 계절 별로 그 당시 아이들이 할 수 있었던 모든 놀이를 함께하며 붙어 다녔다.

단비는 단비대로 같은 또래의 계집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저녁때나 일요일 오후 같은 시간엔 어김없이 본부에 나타났다. 둘은 어깨동무나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를 본부에 가져다 놓고 읽기도 했는데 사차원 세계로 사라진 아이들 이야기와 가끔 특집으로 나오던 비행접시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단비네 집에서 식모 살던 순이 이모가 부르러 올 때까지 둘은 플래시를 켜고 책을 읽었다.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실종된 비행기와 선박의 이야기를 읽으면 무섬증이 몰려와 팔뚝에 닭살 돋은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어깨동무의 별책부록이었던 요철 발명왕을 흉내 내며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을 이것저것 만들어 놀았고 아이는 단비를 위해 수수깡 안경이며 바람개비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이는 움막에 들어앉아 책을 보며 뒹굴거리다 잠이 들기도 했는데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 왔는지 단비가 아이 곁에서 쌔근거리며 단잠에 빠져있기도 했다.

둘은 늘 무언가 소곤댔고 비밀을 공유했으며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기도 했고 손오공이나 자야 같은 과자를 나누어 먹었다. 어느 날은 아이가 책을 읽다 말고 옆에 앉아있는 단비에게 뜬금없이 사팔뜨기 표정을 만들어 보여주었는데 단비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순간 충동적으로 단비의 볼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와락 끌어당겨 볼에 뽀뽀했는데 잠시 깜짝 놀라 얼떨떨해하던 단비가 울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튀어 나가버렸다. 아이는 단비의 그런 행동에 당황해하며 저지른 짓을 후회했는데 단비가 어른들에게 고자질해서 혼나지는 않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갑던 아이가 학교에서 마주쳐도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으며 본부에도 며칠째 발길을 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까무룩 잠이 들어도 순사가 쫓아 오는 꿈을 꾸며 도망 다니는 꿈만 꾸었다. 며칠째 불안해하는 안색을 보이자 춘삼이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며 걱정해 주었지만 아이는 근심이 앞서 춘삼이의 얘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늘 거의 같이 지내던 본부에도 단비가 오질 않으니 가고 싶지 않았다.

단비네 집을 맴돌다 둘이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가장하여 화해를 시도하려 했지만, 단비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느 날은 읍내에서 유일하게 한 대 있었던 단비네 집 자가용 포니에서 단비가 엄마와 내리는 모습만 먼발치에서 보고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이는 후회와 두려움 그리고 알지 못할 그리움까지 복합적으로 뒤섞인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반공일에 학교가 파하고 시무룩 집에 다다르니 아저씨가 차를 몰고 나가고 있었고 아줌마가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또 트럭을 몰고 장거리 출장을 가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지나가는 차에 꾸벅 인사를 했고 아저씨도 손을 흔들어 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이는 마루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며칠 만에 본부에 갔다. 며칠 전 단비가 읽던 잡지가 그 상태로 있었다. 연재만화 작은 아씨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며 아이는 가슴이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날 밤 아이는 늦은 시간까지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아저씨가 출장 나가는 날이면 춘삼이가 아줌마 방에 숨어들어 흘레를 붙는 날이기도 했는데 그날만큼은 둘에게 전혀 관심이 가질 않았다.

그때 창에 조그만 돌이 부딪히며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톡!

잠시 후 또 한 번

톡!

후다닥 창문을 열어보니 플래시가 번쩍 아이를 비추었는데 눈이 부셔 상대를 볼 수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그게 단비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는 반가움에 부리나케 달려나갔지만, 막상 단비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먹 서먹 쭈뼛거렸다. 그때 단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전거 태워줄래?"

아이는 순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훔쳐가며 제법 크게 울기 시작했는데 단비는 어느새 아이에게 다가와 마치 엄마가 우는 아이 달래듯 아이를 토닥여주었다. 아이는 단비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한 비누 냄새를 맡으며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아이는 단비를 뒤에 태우고 동구 밖으로 무작정 내쳐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단비가 등 뒤에서 아이를 감싸 안았는데 따스한 체온이 등으로 느껴졌다.

달은 밝았고 바람은 시원했다.

아이는 갑자기 신이 나서 춘삼이처럼 노래를 흥얼거리며 석우리 냇가 길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단비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목청껏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계속>

 

광양경제신문 webmaster@genews.co.kr

<저작권자 © 광양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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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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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맹이 2020-07-28 09:02:43

    작가님의 다음 글이 아직 안 올라오네요?
    기다려집니다. 이러다 기린이 될 것 같습니다.삭제

    • 목로주점 2020-07-26 12:54:27

      우리민족의 타율성이란 우리민족이 다른 나라의 지배와 간섭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론!
      정체성이란 우리민족이 오랜세월 동안 사회적,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이론..
      이러한 개뼈다귀 같은 식민사관이 오늘날도 우리 사회를
      좀 먹고 있죠.
      아구~열받음!삭제

      • 유석연 2020-07-26 11:36:28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두파로 갈라지더니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또 갈라지고, 영창이냐 광해군이냐를 놓고 또 분열,나중엔 장희빈의 사약문제를 놓고 피터지게 싸웠는데..결국은 당파싸움이 관직의 부족으로 생겨나지 않았나싶군요.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작가님을 통해 조선의역사를 생내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삭제

        • 거래완료 2020-07-25 10:03:40

          조선의 붕당정치.
          붕당정치가 우리나라의 고유물은 아닙니다.
          인간이 모이는 곳은 어디에나 파벌이 존재하고 인맥을 따지게 되죠. 아군이냐 적군이냐.
          이 논제는 인류의 본능입니다.삭제

          • 긴머리소너 2020-07-22 19:51:52

            붕당정치가 악화된 계기가 된 것은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두고 서인과 남인간의 의견차이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동방예의지국답게 죽은 자에 대한 예우를 어떻게 하느냐로 싸움이 난 것 이지요?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예의와 관련된 ‘예법’은 우리가 현재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나 봅니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조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었느냐에 따라 때론 서인이 집권을, 때론 남인이 집권을 하게 되더군요. 비가 와도 뛰지 않았던 양반의 체통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삭제

            15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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