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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강물에 마을을 비추면서 -2

기사승인 2024.04.17  10: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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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전라남도문화관광해설사 나종년, 사진해설·편집/ 이향화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감성과 깨우침 고스란히 전달....

둘째 날의 첫 일정, 우리는 거창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억울한 죽음을 당한 719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의 공간이었다. 거창사건은 6.25전쟁 중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후 퇴각하지 못하고 남쪽에 남아있는 인민군과 빨치산을 색출하는 ‘견벽청야’라는 소탕작전에 의해 산간지역에 숨어있는 인민군과 이에 부역을 한 사람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과정에서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 까지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 청연마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주민 719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중 갓난아이를 포함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있어서는 안 될 가슴 아픈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51년 3월 29일 거창출신 신중목국회의원에 의해 사건이 밝혀졌고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1996년 당시 김영삼대통령에 의해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비로소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하게 되었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은 2004년 8월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2008년 7월과 2012년 7월 광양출신 우윤근국회의원의 대표발의에 의해 ‘거창사건 관련자의 배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발의되어 희생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때 국회사무처 소속으로 보좌관을 역임했던 필자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다. 추모공원안의 전시실에서 귀한 자료를 발견해 주신 장경자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역사의 진실은 결코 숨길 수가 없다. 언젠가는 밝혀진다. 그 진실을 국민은 알 권리가 있고 국가는 그 진실을 밝혀야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야한다. 그래야 억울하게 구천을 떠도는 영령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 영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에게 이런 원통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의 각오를 굳게 다져야 하겠다.
 

‘구형왕릉’
다음코스는 평소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던 ‘구형왕릉’을 찾게 되었다. 국내 유일의 돌로 쌓은 왕릉으로 산청군 공식 홈페이지에 설명되어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많아서 더 학술적 고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산청군청이 방문객들에게 홍보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형왕릉은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이다. 구형왕은 김유신의 증조부로서 521년 왕이 되어 532년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 줄때까지 11년간 왕위에 있었다. 

이 무덤을 왕릉이라고 보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산청군)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더 객관적인 근거가 나와야 할 것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감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두는 장)이 갖추어져 있어서 설득력있는 이론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다. ‘산중에는 배추도 약초다’란 말이 있다. 약초 샤브샤브를 먹었는데 음식도 맛있었지만 동료들과 소통하는 화목한 점심시간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산천재
오후 첫 번째 방문지는 ‘남명 조식유적지’였다. 먼저 선생님께서 기거하셨던 ‘산천재’를 찾았다. 올해 칠순이 되었다는 남자 해설사는 경륜있는 설명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남명과 퇴계 이황은 동년배로서 가깝고도 멀었고 같으면서도 다른 성리학의 라이벌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를 말할 때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꼽는다. 퇴계는 출사를 하였고 남명은 벼슬을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두 사람 다 매화를 극진히 사랑해서 퇴계는 죽을 때 까지 매화를 챙겼고 남명의 남명매는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발하고 있다. 퇴계는 성리학의 이론을 중시했고 남명은 실천을 중시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지킨 의병장 대부분이 실천을 중시하는 남명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김천일, 고경명, 조헌 등이 왜적과 싸워 나라를 지켰다. 남명기념관에 들려 선생님의 기상과 경의(敬義)정신을 마음에 담았다. 남명은 경의도(장도)와 성성자(방울)를 몸에 지니고 늘 깨어 있는 자세로 학문에 전념 하였다. 지금 나 자신은 무엇으로 나를 일깨우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관람했다. 
 

남사예담촌
다음은 이번 답사를 마무리 하는 ‘남사예담촌’을 방문하였다. 인상 좋은 남자해설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예담촌은 2003년 농촌진흥청 농촌전퉁테마마을로 지정되었고 2011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 되었다. 남사예담촌은 옛 담장마을이라는 속뜻과 고즈넉한 담장사이로 우리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100년 된 담쟁이와 부부나무, 거북모양의 대문 잠금장치는 선인들의 지혜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옛집을 소중하게 지켜 나가고 그것을 차별화된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자치단체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면서 1박2일의 인상 깊은 거창, 산청의 선진지 견학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타 지역의 문화관광자원을 둘러보는 것은 책에서 느낄 수 없는 감성과 깨우침이 마음으로 전달되어 머릿속에 각인되기에 우리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되어 주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그 지역의 홍보대사로서 움직이는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다. 

이번 거창, 산청답사를 통해 다시 찾아가 해설을 듣고 싶은 해설사는 누구였을까? 바꾸어 생각해 보면 광양을 찾는 방문객들이 광양의 관광지를 둘러보고 해설사의 해설을 다시 듣고 싶어 찾아오는 실력 있는 해설사가 되도록 우리는 가일층 정진해야 할 것 이다. 남명선생님이 경의검과 성성자를 허리에 차고 자신의 신념을 굳게 하였듯이 우리도 한손에는 마이크를 한손에는 필기구를 들고 현장에서 감동을 전하는 자랑스러운 문화관광해설사가 되어야겠다. 

역사란 우리들의 이야기가 모여 냇물이 되고 그 냇물이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흐른다.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에 내 마음을 비추어 본다. 함께 해주신 사랑하는 우리 동료들, 함께 공부했던 두 분의 주무관님과 따뜻한 배웅을 해주시고 늘 도움을 주시는 시장님과 국장님, 과장님, 팀장님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부족한 이 글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우리 해설사님 들에게 바치고 싶다. 힘내시고 빠른 쾌유를 기원 드린다.

광양경제신문 webmaster@g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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