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향림 수필가
하천 산책로를 혼자 걷는다. 늦은 오후 해넘이께 구름마저 물들어간다. 나란히 걷던 그가 기다리라며 노을처럼 멀어진다. 그가 사라진 길 위는 바람만이 거칠다. 나는 핸드폰을 닫고 일렁이는 바람 앞에 걸음을 떼지 못한다. 춥다는 핑계로 그의 곁을 맴돌까, 머리를 굴린다. 그와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시간을 끌어본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한자리에서 서성이는데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이내 포기한다. 애써 괜찮은 척 걸음을 옮기지만 누군가에게 빼앗긴 그의 온기가 아쉽다. 그가 비운 옆자리를 강바람이 건들며 지나간다. 이깟 바람에 곁을 내줄 수는 없다. 코트를 여미고 그가 날 살피기를 바라며 종종걸음을 친다. 느리게 혹은 빠르게 이동하며 나무 틈으로 그를 확인하고 날 부를 간격을 심는다.
이제 나무에 가려 그의 모습은 읽히지 않는다. 그가 전화기에 갇혀 나를 잊어버린 건가. 나는 이 산책길에서 방황하는데. 꽃도 푸른 이파리도 가려주지 않는 산책길에 나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미적거린다. 지금이라도 그가 온다면 배알 없이 웃어 줄 텐데. 주저하는 내 등을 바람이 떠민다. 아니 내가 부러 그에게 멀어지려 핑계를 대는지 모른다.
그는 날 흔드는 토네이도다. 바람이 강가 나무들을 흔들어댄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들을 발부리로 치며 괜한 관심을 쏟는다. 꽃과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의 계절과 앙상한 가지로 선 시절이 다르지 않다고 잎들이 바스락거린다. 왜 사람들은 화려한 순간만을 기억하는가.
나무는 털어버려 기쁘다고 속삭인다. 우듬지 위 텃새들까지 보탠다. 몸통을 휘감은 말라붙은 덩굴이 나에게 손을 내민다. 내밀다 끊어지고 흔들다 고개를 떨군다. 군데군데 끊어진 줄기의 틈새가 나와 그의 거리려나. 내친김에 하천으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넌다.
이제는 그에게 나를 드러낼 시간이다. 그가 나를 알아보게 단숨에 걸어가야지. 돌을 건너다가 하천의 소용돌이에 눈길이 흐른다. 강물에 갇힌 바람이 맴돌이를 일으키며 물그림자를 삼킨다. 내 마음도 여울 따라 먹힌다. 누군가 날 부른다.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그가 보인다.
그의 머리 위로 새 모형의 구름이 걸렸다. 그가 나에게 가까워질수록 구름은 흩어진다. 이상하다. 그를 불러대던 내 마음이 어디론가 새어나갔나. 그가 내 곁으로 돌아왔는데도 기쁘지 않다. 붙어 있으나 서로 간섭하지 않는 별개 우주다. 기다리며 돌아보던 순간이 해지개에 걸렸다. 사위가 어둑해지고 강물이 황금빛으로 채워진다. 다리를 그와 걸으며 하천 위를 가로지른다.
그와 나는 물속에 비치는 하나의 잔물결일 뿐이다. 그와 나라는 입자가 부딪쳐 생긴 진동이 사방으로 퍼진다. 물속 구름과 나무들이 나를 둘러싸고 바람과 춤춘다. 그를 기다린 산책길로 다시 되돌아온다. 그가 소리친다. 저기 봐. 어디선가 흰 두루미 한 마리가 물가에 섰다. 물에서 나온 건가. 하늘에 머물던 구름이던가. 핸드폰으로 두루미를 찍자 날개를 펼치더니 돌 위로 날아오른다.
안도한 순간도 잠시, 두루미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물속으로 들어갔나. 나란히 걷던 그도 증발이다. 그는 내 곁에 없지만, 이 순간 나와 함께다. 내가 놓지 않으면 몌별하지 않으리라. 내 손에 따듯한 핸드폰만 남았다. 노을이 산 너머로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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