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관수 소설가
성탄절이다. 온 누리가 풍요롭고 기쁨으로 넘치리라. 높은 곳에 계신 예수께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만백성에게 임하셨다. 그 거룩함이 땅끝까지 빛나리라. 우리 땅은 다르다. 12/3 계엄령 탓이다. 성탄절인데 풍요롭지 않고 불안과 우울이 온 거리에 가득하다.그 계엄령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높은 곳에 계신 분들께서 더 높이 오르려는 시도다. 낮은 곳을 향한 거룩함과 달리 더 치솟으려는 탐욕이다. 그 끝은 끔찍하다. 지나친 욕망의 주체는 반드시 꼬꾸라지니까.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실과 밀랍으로 엮은 날개를 달아주며 ‘너무 낮게도 너무 높게도 날지 말라’고 말했다.
이를 무시한 이카로스는 태양 가까이 날아올랐다. 뜨거운 열에 밀랍이 녹아 날개가 망가졌다. 이카로스는 추락하여 숨졌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겐 땅이 얼마만큼 필요한가?」에서 인간의 욕망을 빗대었다. 빠홈은 땅이 많은데 더 많은 땅을 가지려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악마의 꾐에 빠졌다. 빠홈이 하루 동안 걸은 만큼 땅을 싸게 사는데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계약금으로 건 돈을 몽땅 빼앗기는 내기였다. 빠홈은 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 죽을힘을 다해 걸었다. 해지기 전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으나 지쳐 죽고 말았다. 그의 무덤 길이는 2m 남짓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전당포 주인 노파를 이(蝨)라 했다. 그 노파가 고리대금업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는 탓이었다. 그 노파는 끊임없이 돈을 긁어모으고자 가난한 자들에게서 고리의 이자를 갈취했다. 대학생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고자 노파를 살해했다. 위 문학작품 중 이카로스의 날개는 그냥 욕망인 듯하다. 하지만 남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탐욕의 시초라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빠홈이나 노파의 야욕과 다르지 않다. 빠홈이나 노파는 더 갖기 위해 죽을 줄 모르고 땅과 돈을 챙겼다.
세 이미지 모두 타자를 짓밟고 일어선 탐욕의 끝을 보여주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나 재화는 커다란 제로(0)의 영역이다. 이를 ‘제로 게임’이라 치자. 한정된 가치나 재화를 누군가는 더 갖고 누군가는 못 갖는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특정한 자들 중심으로 형성된 탓이다. 자기(편)만 잘살면 된다는 식이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는 후진국형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인가. 이는 틀린 말이다.
계층 간 차별 없이 서로 잘 어울려 살아야 선진국이다.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려는 면모는 자기(편)만 잘살겠다는 의지이기에 어두운 사회다. 12/3 쿠데타가 그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짓밟아 자신의 명예를 고조시키고 치부하려는 가치다. 그런 명분으로 스러진 사람들이 짧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셀 수 없이 많다. 그때는 후진국이라 그렇다 치자. 지금은 선진국인가. 정치판을 보면 후진국이 맞다.
쿠데타도 권한대행도 헌법재판소도 주식도 환율도 산 넘어 산이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성탄 축복이 대한민국에는 미치지 못하는가. 쿠데타가 성탄절 선물인가. 그렇지 않다. 이제는 우리도 쿠데타니 계엄이니 하는 어두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캐럴이 울리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밤길을 밝혀야 한다. 낮은 곳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 탄생이 모두에게 은총으로 빛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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