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여기는 관제탑, 응답하라, 응답하라....제발 응답하라!"

기사승인 2025.01.08  07:53:40

공유
default_news_ad2

- 김경희 광양문화원부원장

2024년 마지막 날 오후에 도착한 무안공항! 차량질서를 위한 안내 요원들 모습이 분주했다. 무안 공항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마치 산소가 없는 것 같았다. 누군가 숨통을 틀어쥐어 옥죄이는 듯 숨쉬기가 곤란해, 나는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함께 간 지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평소 시민사회운동의 대모답게 함께 간 지인이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유족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공항에는 유족들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텐트가 가득했다. 그곳에는 슬픈 소식을 듣고 찾아온 봉사자들과 공무원들이 유족들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큰 슬픔을 당해서 그런지 몰라도 공항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유족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역설적으로 증언해 주는 듯했다.

나는 공무원인 듯 보이는 젊은 여성에게 “혹시 마스크를 얻을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몇 개가 필요하십니까?” 하고 되묻기에 2개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마스크를 얻어 얼굴에 썼다. 너무 경황이 없어 그런지 공항에 설치된 각종 안내 표지판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봉사자에게 “화장실은 어디일까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화장실 입구와 맞닿은 텐트 바깥쪽에 젊은 30대 중 후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옆자리에는 세련된 검정코트를 입은 반듯한 사내가 울먹이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주변에 놓여진 소지품으로 봐서 나는 그 젊은이가 참 예의 바르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일거라고 짐작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속울음을 삼키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심장에는 천 만개의 유리 조각들이 군무를 추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 사내의 등 뒤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천지신명께. 소리 없는 저 눈물이 상처를 치유하는 씻김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빌고 또 빌었다. 세상천지 사방팔방에 있는 전지전능하신 신이란 신들은 모두 무안 공항으로 오시어 슬픔 속에 빠져 있는 이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료해 주시길 손바닥이 닳아질 정도로 빌었다. 사람으로서는 못할 일이니까.

조문을 함께할 일행을 기다려야 해서 다시 잠시 앉을 곳을 찾아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사람이 더 많았다. 각지에서 도착한 봉사 물품들은 종류도 다양하고 모든 것이 넉넉해 보였다. 나는 다시 공항 끄트머리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안으로 들어 온 지 몇 십 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기운이 다 빠져서 식탁에 잠시 육신을 맡기고 엎드려 있으니 남편이 커피를 사오겠다며 나갔다. 남편이 건넨 커피를 두 세 모금 마셨지만 너무 달아서 먹지 못하고 생수로 속을 달래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곁에는 지인이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바르게살기 전라남도 부회장을 맡고 있는 조순애 회장님에게 전화를 하니 다행히 현장에 있어서 식당으로 찾아와 주었다. 너무도 반가웠다. 잠시 인사를 나눈 후 조 회장은 다시 봉사 데스크로 돌아갔다. 그나마 기운이 많이 회복되자 현장 상황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추어탕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6시에 도착할 일행을 기다렸다. 조금 있자, 관옥 이현주 목사님 일행이 유족(KBS 기자의 어머니)과 함께 도착했다.

합동분향소를 체육관에서 공항 안으로 옮기는 바람에 오후 6시부터 참배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실상은 7시가 넘어야 참배가 가능했다. 우리는 함께 하기로 한 일행들이 늦어지는 바람에 체육관으로 옮겨 일행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분향소 앞으로 오니 대한민국 방송카메라는 물론 유튜버들까지 모두가 이곳으로 와 있는 것 같았다. 8시쯤 돼서야 하얀 천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가 참았던 울음을 쏟아냈다. 체육관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함께 동행한 지인은 국화꽃 한 송이를 눈물 속에 올렸고, 우리는 저마다 슬픔을 한가득 마음에 담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애끓는 노모의 절규가 천 개의 바람으로 날리는 그 바람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내 귀에는 “여기는 관제탑, 응답하라!” “여기는 관제탑 제발 응답하라!!”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광양경제신문 webmaster@genews.co.kr

<저작권자 © 광양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nd_ad5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default_news_ad4
default_nd_ad3

최신기사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